한 사이비 보수 논객의 이명박근혜 빨아주기: Harmless Error
아태대표변호사 김성수(70)라는 분이 ㅈㅅ 기고문에서 한 말씀 하셨습니다. '분단된 한국이 통일을 앞둔 시점에서 국력을 키우기 위한 인재 활용에 좀 더 적극적인 함리스 에러 원칙을 적용하는 지혜가 절실하다'고.
ㅋ~ 무식한 국민, 아니 무지한 거기 독자들을 위해 '함리스 에러(Harmless Error·큰 해가 없는 잘못)의 원칙'이라고 괄호까지 동원해 친절한 설명도 덧붙이셨군요. 살다가 Harmless가 대문자로 시작되면 '큰 해'로 번역된다는 말은 처음 듣습니다. 혹시 '작은 해'로 번역하면 어디 덧날까요? 필자의 직업이 거짓말과 궤변으로 먹고 사는 분이니 이런 거 한번 물어보고 싶습니다. 당선녀가 수첩에 의지해서 낙점 했다 줄줄이 낙마하고 계신 분들에게서 보듯이 그 해(害)라는 게 단수가 아닌 복수로 Harmless Errors가 되더라도 그 따위 지혜가 절실할까요?
아날로그 수첩의 용량이 딸려 쩔쩔매시는 당선녀를 빨아주자는 선의의 넋두리인지는 알겠는데요, 이 미쿡 원칙을 빌어오면서 드신 예 즉,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 후 명량해전 승리도 함리스 에러 정신에 일치한다'는 말씀은 무슨 근거인지 진정 아리까리합니다. 혹시 한일병탄 후 일본 역사 선생님께서 알려주신 역사 지식을 여지껏 그리 믿고 계신 건 아니겠죠?
또 다른 예로 '광복 후 신생 대한민국을 이끌어간 이승만 대통령은 그 자신이 독립투사이면서도 주위의 일부 반대에도 친일파로 분류될 수 있는 행정 경력을 가진 인물들을 중용하는 용단을 보여줬다'고요? 차,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예로 들먹이시지 않은 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그냥 측은지심에서 훈수 한마디 합니다. 어디 가서, 특히 젊은이들 있는 곳에서 이런 말씀 하지 마세요. 늙으면 뒈져야지,라는 소리 듣기 십상일겁니다. 차라리 그런 함풀 에러 투성이의 인물이 두 번이나 대한민국 대통령이 된 것도 다 백의민족의 알흠다운 끼리끼리 정신이라고 찬양하시는 게 보기 좋습니다요~
김성수 변호사가 주장하는 함리스 에러는 요즘 패륜아 조의 변호사들이 보이는 현란한 말잔치의 부록입니다. 얼마 만큼이 함리스이고 무엇이 에러인지는 결국 정치적 아젠다에 불과하니 말입니다. 저같은 모지리가 보기엔 이렇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에 절실하게 필요한 지혜는 그런 함리스 에러인지 홈리스 에러같은 기회주의적으로 등장하는 원칙의 적극적인 적용은 아닙니다. 원칙과 상식이 있는 시스템의 부활입니다. 댁의 주군께서 꿈에도 두려워하는 고 노무현 대통령님의 시스템 말입니다. 결국은 사람이 문제라는 말이죠. 댁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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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한겨레에 댁과 같은 같은 사람이 읽어볼만한 좋은 글이 있으니 일독을 권합니다.
<시경>에 실려 있는 ‘큰 쥐’라는 작품은 인류가 남긴 가장 오래된 저항시 가운데 하나다. “큰 쥐야 큰 쥐야/ 내 기장 먹지 마라/ 오랜 세월 너를 받들었는데/ 조금도 나를 돌아보지 않으니/ 맹세코 너를 떠나/ 저 유토피아로 가리라.”(碩鼠碩鼠, 無食我黍! 三歲貫女, 莫我肯顧. 逝將去女, 適彼樂土.) ‘낙토’란 두 글자엔 사람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배어 있다.
쥐 얘기는 <주역>에도 나온다. 승진에 관한 상황인 ‘진괘’(晉卦)에는 “큰 쥐처럼 높이 기어오른다”(晉如鼠)는 말이 나온다. 주변의 멸시는 아랑곳 않고 오로지 자리만 탐하는 자를, 기어오르기의 대가인 큰 쥐에 빗댄 것이다.
이후 쥐는 탐관오리의 대명사가 됐다. <한비자>에는 제환공이 관중에게 나라를 다스릴 때 가장 큰 걱정이 무엇이냐고 묻자 “들쥐새끼들”이라고 답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당나라 시인 조업도 <나라 곳간의 쥐>(官倉鼠)라는 시에서 탐관오리를 쥐새끼라고 성토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쥐를 보고 같은 생각만 하는 건 아니다. 사마천의 <사기> ‘이사열전’을 보면, 훗날 진시황의 재상 자리까지 오르는 이사는 젊은 시절 쥐를 보고 크게 깨달았다. 뒷간의 쥐는 겨우 오물이나 먹으면서 사람이 오면 벌벌 떠는데, 곳간의 쥐는 곡식더미 위에서 대놓고 낟알을 까먹으며 사람이 와도 놀라지 않는다. 이사는 이걸 보고 소리쳤다. “사람이 똑똑하고 미련한 게 쥐와 같으니, 어디에 자리 잡느냐에 달려 있도다!”
사람들의 눈이 다른 건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가령 이사는 아무 증빙 영수증 없이 혈세 까먹는 고위공직자에게선 곳간 쥐의 위풍당당함을, 죽어도 물러남을 모르고 기어오르는 권력 불나방에게선 생쥐 승리의 감격 드라마를 읽을 것이다. 그 쥐를 때려잡으려는 백성들에게는 인재를 아끼라는 호통이 날아올 것이다.
더 해줄 말이 없다. 우리는 그들을 쥐 또는 이사와 같은 사람이라고 불러줄 수밖에 없다.
이상수 철학자 blog.naver.com/xuan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