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 라마
▲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2010년 2월 18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만나 환담하고 있다. 백악관은 중국의 반발을 의식해 면담 장소를 대통령 집무실이 아닌 맵룸으로 택해 비공개로 진행했다. 달라이 라마는 면담이 끝난 뒤 “대단히 기쁘다.”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백악관 홈페이지
2011년 5월 4일 달라이 라마는 로스앤젤레스의 남캘리포니아대(USC) 강연에서 한 학생이 빈라덴에 대해 질문하자 “용서가 모든 걸 잊자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중대한 사안에 대해 대응조처가 필요하다면 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발언이 보도되자, 당시 티베트 망명정부는 논란을 의식한 듯 보도자료를 통해 ‘행위’와 ‘행위자’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던 그는 12일 뉴저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나는 이것(빈라덴 사살)이 잘못됐다고 생각한다”며 “사담 후세인이 교수형에 처해졌을 때와 똑같다. 나는 매우 슬프다”고 말했다고 <아에프페>(AFP) 통신이 전했다.
빈라덴의 죽음에 대해 종교지도자들은 주로 비무장 상태의 그가 사살된 것에 비판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다. 윌리엄 왕자와 케이트 미들턴의 ‘로열 웨딩’ 주례를 맡았던 영국 성공회 수장 로언 윌리엄스 캔터베리 대주교는 지난 5일 기자들의 질문에 “무장하지 않은 사람을 죽이는 것은 정의가 이뤄진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항상 매우 불쾌한 느낌을 남긴다”고 답변한 바 있다. <한겨레신문 인용>
한겨레의 국제분쟁전문기자 정문태는 며칠 전 '환상을 먹고 자란 세계 평화의 우상'이란 글을 한겨레에 올렸다. 제목의 글이 보여주듯 달라이 라마, 특히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세계 평화는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는데 그것은 미쿡이라고 주장한다. 1989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그는 1959년 티베트에서 반중국 항쟁이 거세게 타오르던 시절 시아이에이 계획에 이끌려 인도로 망명했다,고 한다.
다음은 정문태 기자가 지적한 이 종교지도자의 이율배반적 행태의 한 예이다. "돌이켜 보면 달라이 라마의 세계 평화는 해묵은 논란거리였다. “선진국들은 핵무기 폐기를 놓고 인도를 압박하지 말라. 선진국들이 핵무기를 가진 것처럼 인도도 같은 권리가 있다. 몇 나라만 핵무기를 가지고 나머지 나라는 가질 수 없다는 건 민주주의가 아니다.” 달라이 라마는 1998년 5월 석가탄신일에 제2차 핵실험(포크란Ⅱ)을 했던 인도 정부에 세례를 베풀었다. 인류가 전면 핵 폐기를 외치는 마당에 달라이 라마는 철 지난 ‘핵 평등’과 ‘핵 민주화’를 들고나와서 스스로 저속한 인식 수준을 폭로했다. 어쨌든 그 무렵 인도 언론에선 평화의 사도 달라이 라마마저 핵실험을 인정했다며 난리를 피웠다. 인도는 1974년 제1차 핵실험(포크란I) 때도 작전명을 ‘스마일링 붓다’(smiling Buddha)라 흘리며 불교를 이용했던 적이 있다. 인도 정부가 핵실험에서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를 이용한다는 논란이 불거진 까닭이다."
문득 김수환 추기경이 생각나는 건 또 뭘까 ...
정문태의 '달라이 라마' (하)
CIA의 비밀작전, 상처는 컸다 [원문 보기]
상편에서 보여준 달라이 라마에 대한 비판적 언급이 사라지고 CIA가 티베트 대 중국 분쟁에서 수행한 역할로 초점이 바뀐 글이다. 대신 아래와 같은 글이 올라왔다.
<바로잡습니다
2013년 7월13일치 이 칼럼에서는 “(달라이 라마는) 미국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침략전쟁에 입도 뻥긋한 적이 없다”고 썼으나, 그가 전쟁과 관련해 미국에 대한 비판적 성명을 여러 차례 발표한 사례가 있어 바로잡습니다. 또한 “(달라이 라마가 1998년 애플컴퓨터 광고에 등장한 것은) 종교지도자로서는 말할 것도 없고 노벨평화상 수상자로서도 지금까지 유일하게 기업광고에 얼굴을 내민 사건이었다”고 쓴 바 있으나, 이 대목 역시 당시 애플컴퓨터 광고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마틴 루서 킹(1963년), 넬슨 만델라(1993년)가 출연한 바 있어 사실이 아니기에 바로잡습니다. 아울러 칼럼에서 달라이 라마의 사생활을 언급한 부분에 대해 적대자들의 비방을 일방적으로 옮겨 달라이 라마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독자들의 지적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선 유감의 뜻을 표합니다.>
그럼에도 그의 용기 있는 글쓰기에 격려를 보낸다. 왜냐면,
그동안 줄기차게 비폭력과 세계 평화를 외쳐온 달라이 라마는 “시아이에이가 중국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국제정치를 수행했고 우리는 우리나라를 침범한 공산주의자를 거부했다. 우리들의 기본 목표가 충돌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시아이에이 지원을 받아들였다”(마이클 굿먼, , 1986)며 티베트의 무장투쟁에 대해서는 “만약 폭력밖에 대안이 없다는 분명한 징후가 있다면 폭력을 허용할 수 있다”(존 케네스 크나우스, , 1999)고 밝혔다. 또 달라이 라마는 1995년 하버드대학 연설 뒤 질문에 답하면서 “불교도 관점에서 보자면 결과와 동기가 방법보다 중요하다. 중국을 향한 티베트인 저항의 방법은 살해였지만, 그 동기는 동정심이었기 때문에 폭력에 호소가 옳았다”고도 했다.
그렇다면 그 ‘징후’를 누가 판단할 것이며 그 ‘동정심’은 누가 심판할 것인가? 티베트 말고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팔레스타인, 카슈미르 같은 수많은 땅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에 휘말려 고통받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최후·최고의 투쟁 방법이라는 그 비폭력 평화를 편견 없고 조건 없는 ‘반전’이라 배워왔다.
이게 바로 앞글에서 티베트인들의 자유를 향한 투쟁을 존경해오면서도 달라이 라마와 망명정부를 비판 없이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 까닭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