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비판적 톱아보기: 김상구의 김구 청문회 외

원조시지프스 2014. 9. 9. 08:46

주류 역사의 통념에 도전해온 ‘재야 역사 연구자’ 김상구(58·사진)씨가 이승만의 친일 행적을 밝혀낸 데 이어 김구를 재해부한 <김구 청문회>(매직하우스 펴냄)를 출간했다. ‘친일파가 만든 독립영웅’이란 도발적인 부제를 내걸어 논란을 각오한 듯하다.

 

 

“물론 김구 자신이 친일파였던 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친일파 부일배들로 이뤄진 한민당으로부터 많은 자금을 받고 그들과 결탁하기도 했다. <백범일지>도 친일파 이광수가 윤문·첨삭한 것으로, 말미의 ‘나의 소원’도 친필본에는 없다. 자료조사를 통해 그게 이광수의 생각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광수가 1928년 <동아일보>에 쓴 ‘젊은 조선인의 소원’이라는 글과 유사하다.”

 

 

 

김씨는 책의 제2권에서, 백범의 차남인 김신씨의 증언을 그 논거로 인용한다. “춘원은 자신이 그 일을 하겠다고 했답니다. 아버님은 그의 행실 때문에 망설였는데, 누군가가 글솜씨도 있는 사람이고, 속죄하는 기분으로 맡겠다니 시켜보라고 했대요. 그가 윤문을 한 것은 사실이나, 아버님이 그걸 알고 맡기셨는지 의문입니다.”(‘최일남이 만난 사람’ <신동아> 1986년 8월호)

 

 

일찍이 <해방일기>를 쓴 역사학자 김기협씨도 해방 전후사 연구를 하면서 김구에 대한 기존의 고정관념이 깨졌다며 백범의 ‘인간적 한계’를 거론한 적이 있다. 김씨는 “문제는 그보다 더 심각하다”고 주장한다.

 

 

그가 보기에 <백범일지>는 우선 역사 서술의 토대가 되는 기초적 사실, 이른바 사료 인용과 해석의 ‘디테일’부터 오류나 왜곡이 의외로 많다.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을미사변) 이후 퍼져나간 반일운동 당시 백범이 죽였다(1896년 3월)는 ‘쓰치다’는 그의 주장처럼 일본 육군 중위가 아니라 민간 상인이었다. 그 사건으로 인천감옥에 수감된 김구를 사형 직전에 고종이 막 개통된 서울~인천 간 전화로 직접 형집행 정지명령을 내려 살렸다(1896년 윤8월)는 얘기도 사실이 아니다.”

 

 

김씨가 논거로 인용한 한국전자통신연구소 발표 논문을 보면, 궁중과 정부 부처 간 자석식 직통전화가 개통된 것은 1898년 1월, 서울~인천 간 시외전화가 개통된 건 1902년이었다.

 

 

<김구 청문회>에는 이런 논란거리가 가득하다. 그는 김구가 돌연 남북·좌우합작을 주장하며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것도 우파 내부의 권력투쟁 관점에서 바라본다. 또 김구의 집요한 반탁운동이 결과적으로 남한 단정과 분단 고착화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백범의 반소·반공·반탁 노선, 심지어 단독정부 반대와 남북·좌우합작론조차 자신이 대표하는 임시정부 봉대, 즉 자신의 권력 장악을 위한 좌충우돌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왜 하필 지금 김구 비판서인가? “부러 시점을 지금에 맞춘 게 아니다. 10년 가까이 준비해왔다. 집필에만 2년이 걸렸다. 정치적 의도 같은 건 손톱만큼도 없다. 누구는 나더러 ‘뉴라이트’라고 하고 또 누구는 ‘좌빨’이라고도 한다. 이쪽 아니면 저쪽 식의 정치적 시각을 이해하기 어렵다. 굳이 말하자면 나는 아나키스트에 가깝다.”

 

 

그는 2012년에 이어 올해 3월 재발간한 <다시 분노하라: 이승만의 숨겨진 친일행적>(책과나무 펴냄)에서는 이승만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범재 김규흥과 3·1혁명> <전쟁과 기독교: 미 제국의 두 기둥> <믿음이 왜 돈이 되는가> 등의 다른 전작들에서도 그의 저돌적인 자료 발굴 노력은 주목을 받았다.

 

 

독립운동사 전문가인 서굉일(71) 한신대 명예교수는 2일 “일제의 문서 등 프라이머리 소스(1차 사료)를 전거로 제시하는 김씨의 연구는 귀중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재준·문익환 목사의 후학이기도 한 서 교수는 “이런 문제 제기를 외면해선 안 된다. 허점도 있을 수 있지만, 피아로 갈려 싸우지만 말고 이를 기쁘게 받아들여 실사구시적으로 함께 논의하고 제대로 검증해서, 우리가 외면해온 사실들을 정직하게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말했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우리 미래의 방향을 잡는 데 도움이 된다. 이게 책을 쓴 이유다. 김구와 임시정부 등 우파 중심의 역사는 훨씬 더 풍부하고 의미가 컸던 항일독립운동사 전체를 너무 왜소하게 만든다. 역사는 정직하게 써야 한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뻔한 사실도 은폐, 왜곡하면서 뻔뻔하게 역사에 맞기자는 대한민국 주류 세력의 망나니짓과는 별개로

왜곡된 사이 드러났거나 의문을 제기했다 해서 백범의 역사적 가치가 폄훼되는 것은 아니다.

재야사학자 김상구 씨의 노력에 박수와 응원을 보낸다.

 


 

함석헌의 간디 해석에 대한 비판적 성찰

<함석헌과 간디> 박홍규/들녁

 

 

 

 

 

'인문예술 다방면의 ‘르네상스맨’ 박홍규 영남대 교수가 이번에 20세기 대표 사상가인 ‘함석헌과 간디’에 주목했다. 사상을 숭상하는 차원을 넘어 비판적 읽기를 시도한 이 책은 지난해 6월 벌어진 ‘문창극 사태’가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함석헌(1901~1989)이 존경한 간디도 힌두교라는 종교에 바탕을 둔 위대한 사상가이자 행동하는 지성이었다. 또한 생태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인 면도 같다. 하지만 비폭력주의를 정치와 종교의 일치 또는 조화라고 수용한 것은 간디에 대한 오해라고 지적한다. 간디는 정치의 원리와 종교의 원리가 모두 ‘진실’의 추구라고 보았고, 정교일치를 주장한 적도 없다. 함석헌은 또 “간디같이 위대한 혼이 크리스천이 못된 것은 기독교의 부끄러움”이라고 썼지만, 사실 간디는 다원주의적 종교관 때문에 개종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여겼다. 서양문명에 대한 태도도 상반된다. 간디는 인도가 망한 것이 서양문명을 좋아해 스스로 초래한 것이라며, 서양문명 이전의 물레를 돌리는 마을 자치 공동체로 돌아가자고 한다.

 

'이에 반해 함석헌은 미국 여행에서 돌아와 기계문명과 서부개척정신을 높이 사며 “넓은 곳으로 이민을 가라”고 채근한다. 함석헌이 믿은 기독교는 제국주의적 잔재였고, 비폭력이 반제국주의에서 나오는 것을 명백히 자각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지은이는 “함석헌을 되살리고 한국을 되살리는 길이 간디의 사상을 주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수용하는 방법이며, 간디와 함께 함석헌을 뛰어넘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맺는다.'

 

한겨레신문 권귀순 기자.

 

이 책은 2014년에 국무총리 후보자 문창극이 함석헌 선생의 글을 인용하면서 촉발된 '악마의 편집', 이른바 '문창극 사태'가 계기가 됐다. 당시 동아일보는 칼럼에서 함석헌을 문창극처럼 편집하면 친일 반민족주의자로 만들 수 있다면서 교묘한 화술로 적극적으로 공개적으로 문창극 국무총리후보자를 옹호했다. 박홍규 교수는 이런 사태의 전제인 함석헌 선생의 말씀 자체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한다. 또 두 인물은 닮은 점만큼이나 다른 점도 많았는데 대표적인 게 사회주의의 수용 여부였다. 간디는 오케이, 함석헌은 노오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