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더길

나목

원조시지프스 2015. 1. 12. 18:27

 

한여름의 태풍은 지구의 주인이 누구인지 가르쳐 주고

한겨울의 나무는 자연에 순응하는 삶의 지혜를 보여 준다.

사피엔스를 장착한 지구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는 

겨울에는 거위와 오리를 잡고 여름에는 개와 닭을 잡아

대지는 동물의 무덤이 되고 하늘은 탄소의 풀장이 된다.

인류의 복지는 인간을 뺀 자연생물계의 재앙이 돼 버렸다.

 

 

나무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서

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고 있다

밤이면 메마른 손끝에 아름다운 별빛을 받아

드러낸 몸통에서 흙 속에 박은 뿌리까지

그것으로 말끔히 씻어내려는 것이겠지

터진 살갗에 새겨진 고달픈 삶이나

뒤틀린 허리에 배인 구질구질한 나날이야

부끄러울 것도 숨길 것도 없어

한밤에 내려 몸을 덮는 눈 따위

흔들어 시원스레 털어 다시 알몸이 되겠지만

알고 있을까 그들 때로 서로 부둥켜안고

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뜨릴 때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신경림, 나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