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적인 짝퉁과 기원
그리고 미소를
-폴 엘뤼아르-
밤은 결코 완전한 것이 아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주장하기 때문에
슬픔의 끝에는 언제나
열려있는 창이 있고
불 켜진 창이 있다.
언제나 꿈은 깨어나며
욕망은 충족되고
굶주림은 채워진다.
관대한 마음과
내미는 손 열려 있는 손이 있고
주의 깊은 눈이 있고,
함께 나누어야 할 삶
삶이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손이 있고
마주치지 않는 눈이 있고
나누어야 할 짐, 짐만 있는 이
나라.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 김사인, <조용한 일> -
2007년 조슈아 벨이 미국 워싱턴시의 한 지하철역에서 약 30억원짜리 스트라디바리우스로 40여분간 연주했다. 그 시간 약 천여명이 그 앞을 지나갔지만 1분 이상 머물러 음악을 들은 사람은 고작 7명 정도. 길거리 악사로 변장한 조슈아 벨의 그날 수입은 27명에게서 받은 32달러17센트가 전부였다. 이 실험을 하기 이틀 전 보스턴에서 열린 조슈아 벨의 연주회는 최하 13만원부터 시작하는 관람권이 전석 매진될 정도로 성황이었다.
<워싱턴 포스트> 신문이 제안한 이 실험은 시민들의 예술적 감각과 취향 측정이 목적이었다. 사람들은 음악에 대한 이해로 값비싼 콘서트장에 간다기보다 연주자와 연주 장소의 브랜드 가치를 소비한다. 예술의 소비는 포장을 어떻게 하느냐가 관건이라는 것. 이 뻔한 실험 결과 앞에 대중의 예술소비성향의 부박함 어쩌고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한 꼰대질에 불과해 보인다. 다만 내게 문제적인 것은 상대적으로 싼값에 대중이 비교적 평등하고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책의 구매에서조차 획일적인 거품권위 종속현상이 심하다는 것이다. 좋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건 마땅히 반길 일이지만, 그렇지 않은 책이 ‘포장’과 ‘영업’ 덕택에 베스트셀러가 되는 경우 말이다. “책은 우리 내면에 얼어 있는 바다를 내려치는 도끼 같은 것이어야만 한다”는 카프카의 저 서늘한 전언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독서 취향을 가진 깐깐한 독자들이 베스트셀러 서적 목록에 균열을 내주는 날을 기다린다.
- 한겨레신문에 실린 김선우 시인·소설가의 '[김선우의 빨강]에서 -
구부러진 길을 가면
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
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도 많이 모여 살듯이
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 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
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
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
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
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
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길을 갈 때 항상 갈 길이 조금 멀더라도,
대로 보다는 소로나 골목길을 택해서 간다.
고속도로처럼 일직선으로 반듯하게 난 길보다
한 동네를 구불구불 돌아가는 골목길.
풀향기가 자욱한 시골마을을
구불구불 안고 돌아가는 그런 길을 좋아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
칼날같은 직언과 직설보다는
내면의 향기를 품은 은유와 여유로
구부러진 길모퉁이를 돌아가듯
보일 듯 말 듯한 생각을 놓고 가는
그런 사람이 좋다.
웅변하듯
큰 소리로 열변을 토하는 말 많은 사람 보다는
조용히 음미하며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다
함축적인 의미를 담은 한마디를
낮은 목청으로 넌지시 던지며
자기 이해를 구하는 그런 사람이 좋다.
산과 마을을 품고 돌아가는
구부러진 길 같은 이해심 낳은
세상의 인연들을 만나고 싶다.
아무런 장애도 없는 길을 걸어온 사람 보다는
구불구불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에게서 나는
눈물겨운 삶의 향기가 느껴지는
그런 사람이 좋다.
구부러진 내 마음의 오솔길에서
나는 또 다른 나를 만난다.
- 이준관, <구부러진 길> -
햇살 아래 졸고 있는
상냥한 눈썹, 한 잎의 풀도
그 뿌리를
어둡고 차가운 흙에
내리고 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지만
그곳이 그리워지기도 하는 모양이다.)
어느 날 갑자기 나무는 말이 없고
생각에 잠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하나
둘
(탄식과 허우적댐으로
떠오르게 하는)
이파리를
떨군다.
나무는 창백한 이마를 숙이고
몽롱히
시선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
챙강챙강 부딪히며
깊어지는 낙엽더미
아래에.
- 황인숙, <어느 날 갑자기 나무는 말이 없고>
2015 06/03
숲에 가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더군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이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 정희성, <숲> -
2015 3/4
꽃 피기 전 봄 산처럼
꽃 핀 봄 산처럼
꽃 지는 봄 산처럼
꽃 진 봄 산처럼
나도 누군가의 가슴
한번 울렁여보았으면
- 함민복, <마흔 번째 봄> -
2014 03/20
세상의 묵은 때들 적시며 씻겨주려고
초롱총롱 환하다 봄비
너 지상의 맑고 깨끗한 빗자루 하나
- 박남준, <깨끗한 빗자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