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더길

원조시지프스 2018. 10. 18. 08:12

11월




단풍! 좋지만

내 몸의 잎사귀

귀때기가 얇아지는

11월은 불안하다


어디서

죽은 풀무치 소리를 내면서

프로판가스가 자꾸만 새고 있을 11월


- 서정춘, <귀> , 시와시학사, 2005년 -







괜히 11월일까

마음 가난한 사람들끼리

따뜻한 눈빛 나누라고

언덕 오를 때 끌고 밀어주라고

서로 안아 심장 데우라고

같은 곳 바라보며 웃으라고

끝내 사랑하라고

당신과 나 똑같은 키로

11

나란히 세워놓은 게지


- 이호준, <티그리스강에는 샤가 산다> , 천년의 시작 -




11월은 모두가 혼자 있기 좋은 달


방아깨비의 높이가 점점 사라지는

오후 그리고 풀밭

내겐 도무지

서러워할 까닭이 없다

찬찬히 눕는 엷은 빛을

목이 긴 국자로 떠서

다시 태양에게 돌려보낸다

커다란 눈이 하늘에서 내려와

오도카니 앉아 있다

거미의 야심에

씹하듯 동참한다

저놈의 생각에

구멍을 내야지

흔들어버려야지

거미가 으앙으앙

발을 뻗고 울게 해야지

생각은 생각으로

쌩을 깔 뿐

달아나는 풍경 한 줄

끌어오지 못한다

기껏해야

아이가 풀짝거리며 잡았다 놓아준

기간의 노란 부리 하나

무릎 위에 놓고

유심히 닦는다

안경이 안경을 닦듯

뒤집은 돌을

다시 뒤집어놓듯

새벽녘 새끼 고양이처럼

나를 나 몰래 다녀간다

금방 있던 거미가 없다


- 유강희 <고백이 참 희망적이네> 중, 문학동네 시인선 113 -

'온더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형용모순  (0) 2018.11.28
동행27  (0) 2018.11.06
걷고 누르고 31 - 낮잠  (0) 2018.08.20
DMZ ART FESTA  (0) 2018.08.15
무소속 구청장  (0) 2018.0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