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더길

이거니의 너얼븐 오지랖을 보자면 드는 생각

원조시지프스 2014. 1. 28. 12:58

 

천재 백남준의 미디어아트나 그의 모든 퍼포먼스의 핵심은 소통이다.

일단 앉아봐봐 ~

 

충남대 영문학과 교수 오길영이 젊은 소설가 황정은의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격찬하였다. 그만의 형식과 문체를 갖추었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 오 교수는 그 상찬의 글 서두에서 양우석의 <변호인>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변호인>의 양우석 감독의 말. “그 어떤 사람도 고문당한 진우의 모습을 맞닥뜨리면 당장 피가 끓을 것이다. 화를 주체하지 못해 소란을 피우고 난리법석을 떠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밤새워 책을 읽고 날이 밝자마자 선배를 찾아가 질문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똑같이 흥분한다고 해도 그 ‘성찰’의 모습이 차이를 만든다.” 세상을 움직이는 건 단지 분노와 열정만이 아니다. 물론 그것들도 필요하다. 상식인이라면 세상의 모순과 불합리를 목격하면 대개는 그런 분노를 느낀다. 지금은 그런 분노조차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피로사회’가 된 느낌이지만. 그러나 즉자적 분노는 오래 못 간다. 분노를 뒷받침하는 냉철한 이성과 철저한 자료조사와 분석, 치밀한 대응이 없었다면 송변은 부당한 국가권력에 맞서지 못했을 것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지만, 무지가 도움이 된 적은 한 번도 없다는 말도 있다. 무지의 용감함은 독단을 낳는다. 우리가 송변 같은 ‘변호인’에게 감응을 받는다면 그건 역설적으로 지금 우리 시대에 깊이 “성찰”하는 법조인이 드물기 때문이리라.

 

"세상의 이면을 파고드는 작가의 경우에도 분노는 양날의 칼과 같다. 세속의 면모들에 둔감하고 사람들의 삶과 고통에 무감하고 분노할 줄 모르는 작가가 좋은 작품을 쓸 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분노가 바로 일급의 작품을 낳는 것도 아니다. 뛰어난 작가는 분노를 날것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분노는 차가운 이성과 성찰의 단계를 거쳐 구체화되어야 하고, 그 분노를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형식과 문체(스타일)를 찾아야 한다. 걸작의 최종 근거는 내용이 아니라 형식과 문체다. 수많은 작품들이 남녀의 사랑을 대동소이하게 다루지만 <안나 카레니나>나 <보바리 부인>을 돋보이게 하는 건 이들 작품만이 지닌 고유한 형식과 문체다."

 

닥대통년

 

내 생각에

 

우리 사회에서 친일파 세력의 득세와 영달은 영구히 꺼지지 않을 것만 같다. 오히려 그들에게 가까이 갈수록 혹시 사라져버릴 수도 있었던 어떤 기회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부끄러운 착각도 든다. 그런 착각의 현실화는 로또 대박의 확률보다 훨씬 더 높고 실제적이리라. 대학 총장들에게 그들 제자의 삼성 입학 재량권을 허한 이건희를 보라. 지역별로 대학별로 입사 가능 쿼터를 할당하는 이건희 권력은 가히 대통령 할아비급이라. '창조적이라면 창조적인 이 오만'을 보라 (심상정 정의당의원). 그와 자형-처남 관계인 홍석현의 중앙일보에 따르면 삼성이 돈줄을 대고 있는 성균관대가 서열상 서울대학교를 추월했다고 한다. 상식 있는 한국인으로 입법, 사법, 행정에서부터 상아탑까지 대한민국 1% 세력이 이건희의 관리 대상임을 모르고 있는 자가 누가 있을까. 그래서 사람들은 그 사람을 따라 해서 때로는 성공하고 때로는 민주당처럼 쪽박을 찬다. 그들만의 고유한 정치 형식과 문체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반사회적이고 반인륜적이며 노골적으로 차별적이기까지 한 지금의 세태에 대한 분노를 차분하게 유지하면서 이 세습적 분노를 정교하게 발전시키기란 정말 쉽지 않다. 하루하루를 목맨 송아지꼴로 사는 우리네야 더 말할 나위도 없고. 그래서 필요한 게 연대다. 느슨하지만 쉽게 단절되지 않는 조직. 친일인명사전을 만들어냈던 그 형식. 돼지저금통으로 바람을 일으켰던 그 문체. 바다를 향해 도도하게 흘러가는 민심의 강물, 그게 99% 시민에게 필요한 형식이자 문체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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