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더길

문 5

원조시지프스 2017. 5. 25. 21:13



미술관에서 작품으로서의 문

미래·과거를 위한 일, '17 12/12 - '18 3/4






승부처


안팎에 사람이 있다


안에 있어서 불안한 사람

창문 밖을 흘끗 내다본다

아무도 없으면

시간을 벌 수도 있다


안에 있는 사람은 더 이상 들어갈 데가 없다

막혀 있다고 느낀다


재떨이에 수북이 쌓인 담배꽁초처럼

초라하고 고단하다


밖에 있어서 외로운 사람

건물을 올려다본다

아무도 없으면

시간에 쫓길 수도 있다


밖에 있는 사람은 더 이상 나갈 데가 없다

갇혀 있다고 느낀다


재떨이에서 벗어난 담뱃재처럼

외롭고 서럽다


위로 올라갈 수도

아래로 내려갈 수도 있는

층계참에서


사람이 사람을 기다린다

사람이 사람을 경계한다


안팎과 무관한

벽과 문이

[燭]을 바짝 세우고 있다


- 오은, <유에서 유> 중 '승부처' -



철거


아무리 봐도 손목뼈다


재개발 현장 산더미 폐기물 무덤

깨진 벽돌 슬레이트 쪼가리 부서진 기왓장 구겨진 씽크대

뜯겨진 문틀 포마이카 밥상 부서진 액자 구겨진 흑백사진

아이들 책가방 삼각자 물안경 메달

나훈아 테이프 동의보감 토정비결 보일러 2급 시험문제집


뜯어낸 것이다 불법광고물 뜯어내듯이 삶들을

누군가 백골이 되도록 누워 있었고


레이스 달린 속옷과 뜨개질 실뭉치

오래된 교과서와 콘돔과 비타민 약병

목화솜 이불과 과실주 담근 병과 아이들 상장


긁어낸 것이다 늘어붙은 장판 긁어내듯이

포클레인이 지붕을 파고들고

철거반원이 울부짖는 사람들을 들어낼 동안에도

붙들고 있었을 것이다 귀도 눈도 썩어 없었으나

손목은 끝내 붙들고 놓지 않았을 것이다


- 백무선 <폐허를 인양하다> 중 -




구원, 생명의 문


공중화장실 화장지집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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