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영필 선생은 구한말 영남 보부상 총책이었고, 당시 밀양의 부호였던 한씨 문중과 혼인한 구성백의 맏아들로 1891년 태어났다. 국권 상실 후 본가와 외가는 식구 40여명 전원이 만주로 이주하였고,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전 재산을 처분하여 바쳤다.
'그의 아들 구수만 선생은 배재고보를 다니던 1930년 전국적 항일시위의 주모자로 몰려 검거되었다. 이후 청년 시절 수차례 이어진 옥살이와 고문으로 육신은 완전히 망가졌고, 40대 이후에는 끝내 실명하고 말았다.
'그의 손녀 구미현의 유년 시절은 극빈을 벗어날 수 없었다. 구영필의 독립유공자 서훈은 네 번이나 거부당했다. 유년기의 영양 결핍으로 일생 동안 병치레로 시달리던 구미현은 밀양으로 이주하여 겨우 건강을 회복했고, 편안한 노년을 누리려 할 무렵, 집 뒷산을 지나가는 초고압 송전탑으로 몸에 쇠사슬을 걸고 수천명 경찰력에 맞서 싸우는 할머니 투사가 되어야 했다.' <이계삼 칼럼니스트>
대한민국의 근대역사에서 애국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고 그 결과는 어떻다는 걸 잘 보여준 집안 내력이다.
요즘 공무원 면접시험에서 ‘애국가 4절을 부를 수 있냐?’,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우느냐?’
‘태극기 4괘를 아냐?’는 등의 질문이 나오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의 친일반민족 리더십 집단이 애국이를 어떻게 상용화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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