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더길

학고재 갤러리, 강요배 소묘전 외

원조시지프스 2014. 3. 31. 17:08

남의 능력을 그것도 갈고닦은 능력의 결과물을 구경한다는 것은 불구경보다 재미있다. 어떤 결과물, 예를 들어 빅뱅의 중력파 확인 운운 하는 것은 설명을 들어도 이해가 안 가는 능력이지만 예술은 그렇지 않다. 음악이면 음악, 미술이면 미술, 그냥 자신의 소갈머리 수준에 맞춰 즐기면 되기에.

 

 

'김인배 작가는 미술의 가장 기본 요소인 점·선·면에 대한 부정에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좁게는 존재하는 조형 언어에 대한 부정이며, 넓게는 세계를 구성되어 있다고 보여지는 시스템에 대한 부정이다. 우리가 존재한다고 여기는 모든 의미와 개념들이 기실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한계임을 드러내며, 그것에 얽매여 살아가는 자신의 혹은 우리의 실존을 다루는데, 그 실존이 겪어야만 하는 부조리는 본 전시에서 빛과 어둠의 대비로 풀어진다'. 아라리오 갤러리가 소격동으로 이전하여 첫 전시로 연 김인배 개인전 <점·선·면을 제거하라>에 대한 한 장짜리 소개글에 나온 한 대목이다. 

 

 

솔직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막걸리 아닐까? 아마도 작가는 각각의 조각품을 점으로 보고 그것들을 한 평면에서 선으로 연결하여 세 개 층에 나열된 것들의 총체적인 상황으로 자신의 인식 관점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지 짐작한다. 그래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갤러리 전면에 걸쳐놓은 이 펼침막에는 나오는

 

 

 

 

저 똥인지 성기인지 모르는 그것이 지하에 설치된, 워싱턴에 있는 링컨상처럼 떡허니 앉아 있는 <섬광>에게서는 왜 보이지 않는지 궁금했다. 이를테면 뭔가를 제거함으로써 새로운 조형언어를 구사하자는 게 작가 전시회의 컨셉이라면 2층의 어둠 속에 있던 저 십자가상 작품에서도 그게 없어야 하지 않냐 그 말이다.

 

김인배의 작품 개념과 정반대의 느낌을 받은 전시회가 갤러리 자작나무에서 열리고 있다. 4인의 출품 작가 중 한 명인 김영재가 그렇다.

 

그는 선으로 면을 만든다. 캔버스 위에 그려진 촘촘한 아크릴 선들로 만들어진 한 인물의 형상이 다른 인물 형상과 뫼비우스의 띠처럼 교접한다. 선의 변화로 입체감을 자아내 제삼의 이미지를 만드니 여기에서는 점·선·면이 서로 조응하여 서로 간의 경계를 없애버린다. 능력을 벗어나는 두 김 씨의 작품 품질에 대한 비교를 떠나 공간적인 경제성이나 개별 작품이 주는 미적 임팩트 면에서 김영재가 조금 낫지 않나 싶다.

 

 

 

 

 

김영재의 아크릴 작품에 눈의 초점이 싱숭생숭할 때 갤러리 현대로 옮겨 가면 아주 네온사인의 우물에 풍덩 빠져볼 수 있다.

 

 

칠레 산티아고 출신의 작가 이반 나바로(Iván Navarro)의 개인전 <299 792 458 m/s>.

 

 

팸플릿에는 ‘조각과 설치’라고 나와 있는데 조각품은 어디에 다 꼬부리쳐 놨는지 네온과 형광등, 거울을 사용한 설치작품만 14점 전시되어 있었다.

 

 

이런 작품들이 나오게 된 게 작가가 유년시절에 겪었던 피노체트 독재정권 시절에 겪은 ‘통금’과 ‘정전’이라는 경험이었다는 설명만으로도 작품 하나하나가 진짜 정말 즐거웠다.

 

 

똑같은 형태의 네온과 거울 그리고 거울 가운데에 적혀 있는 단어들이

 

 

가로와 세로, 수직으로 수렴해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옛날의 어떤 몽환적 기분이 되새김질 된다. 갤러리에 도시락 반입이 허락된다면 그냥 하루 종일 멍하니 이들 앞에 앉아 있고 싶다.

 

 

그래도 결론은 라스코 동굴 벽화에서 볼 수 있었던 그림, 바로 학고재에서 열리는 강요배의 소묘전이다.

 

 

1985년부터 2014년까지 30년에 걸쳐 그린 소묘 53점을 비롯해 아크릴작품 4점도 전시되었다. 그림을 직업으로 다루는 분에게 소묘란 아마추어 사진가가 비싼 사진기의 기능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수준에 비견할 수 있지 않을까.

 

 

유명 화가 외에는 소묘를 걸고 하는 전시회가 뜸한 이유가 아닐까 한다. 젊은 시절의 도심 민중에서 벗어나 고향 제주로 돌아간 작가는 제주의 풍경을 담백하게 그려낸다. 그러나 돌하루방 시리즈에는 여전히 시대에 대한 예리한 관심이 넉넉한 유머를 담아 나타나고 있다. 금강산 답사기도 빠지지 않았고. 불행히(?) 학고재에서는 사진 촬영을 금한다.

 

 

'젖먹이' 160×130cm 아크릴물감 2007. '제주4·3(1947-1954)'을 주제로 북촌마을에서 한 부인이 학살당하자 그 죽은 엄마의 젖을 빨고 있다는 증언을 바탕으로 그린 2007년 작. 이번에 전시된 건 아니나 그가 민중화가임을 보여준다. '강요배 소묘전' 기사 보기.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우럭이나 학고재 제2 전시장에서 계속되는 컬러 그림들에서는 만개된 화가의 의식이 추상성으로 나타난다. 그는 그림을 개인과 사회, 역사와 세계를 공부한 결과를 보여주는 '사상보고서'라고 말한다. (위와 아래의 두 사진은 나도 모르게 내 손이 찍었다.)

 

 

그래서 강요배 작가는 자신의 추상화 경향을 'Less is More(적은 게 많은 것)' 한 문장으로 대신한다. 왜 안 그러겠는가. 그의 친구가 대학 자취방 친구 박재동 화백이다. 박 화백은 한 컷 시사만화역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

 

 

 

그래도 돌아오는 길 내내 김인배 작가의 작품들이 마음에 걸렸다. 대체 그 <섬광> ㄴ의 거시기는 어디 갔을까? 혹시 제단처럼 생긴 상 위에 놓은 구형들이 그걸 분리, 제거하여 다듬은 결과물 아닐까? 그렇게 점·선·면을 제거해서 뭘 어쩌겠다는 것일까? 갤러리의 전속 작가라는데 수입이 괜찮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아 참, 원세훈 이 ㄴ은 어찌 되었을까?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에서 쥐바기의 꼬리가 드러나 대한민국이 전 세계에서 통째로 갤러리가 되는 날, 그 날이 꼭 왔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민예총 사무총장 시절인 90년대 초반, 용태 형은 파주 덕은리에 있던 강요배의 작업실에 자주 놀러왔다. “위채에 강요배와 김용덕, 아래채에는 나와 김기호가 있던 그 무렵 작업실은 술과 노래와 토론이 날뛰는 집회장이었고 지방 상경객들의 합숙소였고 신입회원들의 교육장이었다. 용태 형이 멸치 육수로 제법 맛을 낸 국수 몇 그릇과 김기호가 한 다라 무쳐낸 콩나물을 안주로 막걸리 수십 병을 비워도 끝날 줄 모르는 자리였다. 작업실 뒤편 햇살 좋은 무덤가에 둘러앉아 시국담과 만담, 우주적 상상력이 넘나드는 구라, 그러다 느닷없는 씨름판이 어우러진 그런 자리를 용태 형은 좋아했다.”

 

이종률(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념사업국장)의  김용태 선생을 기린 한겨레신문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