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온 지 조금 된 프랑스 영화 irreversible. 멀미가 날 정도로 한참을 요란하게 흔들리는 카메라워크로 시작된 영화는 첫 장면부터 끔직하다. 늦은 밤에 잘 생긴 두 남자가 게이바를 찾아가 그 중 한 명이 못 생긴 한 손님을 간신히 찾아내 휴대용 소화기 같은 물건을 사용하여 얼굴을 묵사발 낸다. 그는 구경꾼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악한이라 짐작되는 그 자의 얼굴을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무수하게 구타한다. 타이틀이 시사하듯 녀석은 이제 살더라도 절대 과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지 못하리라는 공감대가 강제된다.
여전히 흔들리는 카메라로 장면이 바뀌면서 그들이 어떻게 게이바를 찾아오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한 컷 한 컷 되짚어 본다. 감독은 몇몇 핵심 장면에서 롱테이크 기법을 사용하여 관객들에게 철저히 배우들에게 동화되도록 강요한다. 얼굴을 묵사발 내는 장면, 그의 전 아내가 시내 지하통로에서 그 ㄴ에게 강간 당하는 장면, 그와 그의 절친이자 전 아내의 새 남자친구, 그리고 전 아내이자 이제는 친구 사이인 여자, 이렇게 셋이 전철 안에서 다른 승객들이 있는데도 '나는 안 됐는데, 너는 어찌 됐냐'는 노골적인 섹스 담론. 제일 마지막으로 동거남과의 관계에서 굳이 원하지 않았지만 찾아온 임신에 행복해 했던, 화창한 봄날 오후 풀밭에 누워 미소 짓는 여자의 모습. 그리고 하늘로 우아하게 돌며 울려퍼지는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
롱테이크 신들은 처음부터 어느 장면 하나 이성과 감정의 멀미를 느끼지 않고는 계속 지켜 볼 수 없다. 어느 순간 카메라가 딱 고정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눈 감고 소리만 들어도 장면이 그려진다. 감독은 말한다. 두 명의 시민이 왜 공권력을 믿지 않고 직접 응징에 나서게 되었는지.
지구상에서 독도에 가는 직항노선은 없다. 베이스캠프 울릉도는 복 받은 섬이다. 관광객들, 그것도 배멀미를 무릅쓰고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가을철까지 이어진다니. 30여년 전 구축함 4개월 근무 때 배멀미를 안 하면 평생 안하냐 그 말이다. 눈물 콧물이 줄줄 흐르고 의지를 무시하고 폭발하는 '우웩'소리 ... 속이 뒤집어지는데 아주 죽는 줄 알았다. 다행히 주변 처자들도 같이 해줘서 덜 쪽팔렸지 거의 시체의 몰골이 되어 울렁울렁 울릉도에 내렸다. 첫날 묵호에서 출발한 3시간 짜리 여행보다 다음날 독도에서 돌아오는 한시간 반짜리 길은 더 가관이었다. 그 시간 동안 롤러코스트를 타는 줄 알았다. 도착시각을 30여 분 앞두고는 객실 사방에서 마치 오케스트라 튜닝이 시작되듯 갖가지 음색으로 울려퍼지는 우웩 소리가 울려퍼지는 선실은
연옥이 따로 없다. 우리의 배멀미가 현실이듯 청마 유치환의 팔색조 변신도 사실이었다.
이랬던 그가 사실은 1942년 2월6일 만선일보(滿鮮日報)에 '대동아전쟁과 문필가의 각오'라는 제목의 글에서
'오늘 대동아전(大東亞戰)의 의의와 제국(帝國)의 지위는 일즉 역사의 어느 시대나 어느 나라의 그것보다 비류없이 위대한 것일 겝니다. 이러한 의미로운 오늘 황국신민(皇國臣民)된 우리는(중략)..오늘 혁혁(赫赫)한 일본의 지도적(指導的) 지반(地盤) 우에다 바비론 이상의 현란한 문화를 건설하여야 할 것은 오로지 예술가에게 지어진 커다란 사명이 아닐 수 업습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런 커다란 사명은 사노비 출신 안용복이 입이 아닌 몸으로 해낸 바 있다. 안용복은 1690년대에 일본에 대항하여 울릉도와 독도를 지켜냈고 3세기나 흘러가기 전인 광복후 1954년, 부산의 한 애국 단체에 의해 장군으로 추존식을 거행함으로 실제 장군은 아니었으나 현재까지 안용복 장군으로 불리우고 있다.
역사는 배우는 자의 몫.
울릉도에는 또 독도박물관 명예관장인 이종학(李鍾學.1927-2002.11.23)이 있다.
"여기 / 국토의 막내 / 독도의 영유권 수호를 위하여 /
일생을 바친 이가 있으니 / 정녕 겨레의 사표요 / 의인이라 할 것이며
그 숭고한 행적은 / 민족의 역사와 함께 / 영원히 빛날 것이다….”
(송덕비문 일부)
세종대왕의 친형인 양녕대군의 21세손인 선생은 40여년 동안 일본을 50여 차례 방문해 독도 관련 자료를 모았다. 선생께서 모은 독도 자료 1300여점을 토대로 97년 독도박물관이 건립됐다.
안용복 장군과 이종학 공의 지대한 업적을 비교하자는 것은 아니나 두 분의 대우에서 특별히 아쉬운 점은 안 장군의 비석은 관광객들이 '우연'의 도움 없이는 찾기 힘든 박물관 밑자락 산책길 구석 응달 속에 처박혀 있는 반면에 사운의 비는 박물관 바로 옆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 박물관을 재벌기관 삼성에서 지어 군에 기부채납했다는 것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조치다. 아무리 군수가 새누리당 소속이라지만 말이다.
여튼 거기에서는
어여쁘신 박물관장님께서
풍부한 일본 측 자료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독도의 역사를 알기 쉽게 알려주신다.
1785년 일본인이 제작한 지도. 독도를 조선과 같은 색으로 칠하고 '조선 것'이라고 부기하였다.
로비 한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재미교포 초등학생들의 독도사랑 기념 그림.
박물관 옆에는 망향봉으로 올라가는 케이블카 건물이 있는데
씩씩하게 불금의 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도동항이 보인다.
해 끄고 불 키고!
어부들의 밤새 노고의 결과물. 거북바위 앞
가는 세월 그 누구가 ~~
새날이 밝으니 가슴이 뛴다. 아 ~~ 오늘 독도행 배편은 또 얼마나 견뎌낼 수 있을까.
사실 독도는 물론 어느 여행지도 실제로 가 본 사람보다는 정보 접속력이 뛰어난 사람이 더 잘 알 수도 있다.
지난 7월 사진가 김중만은 2년에 걸쳐 담은 독도의 모습을 대중에게 선 보인 바 있었다.
그러나
산티아고 여행기를 읽는다는 것과 산티아고에서 땀(아니면 '우웩')을 흘려본다는 것은
사랑을 안다는 것과 사랑을 한다는 것 만큼 천양지차.
촛대바위와 삼형제굴바위.
No, no! That's my belt. 헐크 호간의 검지손가락 신공과 함게 느껴지는
올림픽공원 내 소마미술관 앞의 발다치니 세자르(프랑스) 작가의 엄지손가락. 가난한 이탈리아 이민, 선술집의 아들로 태어나 말년에 제작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폐차장의 압축된 자동차 쓰레기 더미에 서명하고 작품이라 내놓은 자신의 자부심을 한껏 자랑한다.
내지는 서울숲 조각공원에 있는 강희덕의 약속의 손II.
다양한 운동화에서 독도경비대 경찰들이 누리는 인권의 현주소를 좋은 쪽으로 생각해 본다.
지천으로 깔린 해국(
삼형제굴바위는 의젓한 킹콩의 모습이다.
진정한 보수의 아름다운 정신을 마치 진보인 양 주장해야 하는 이 시국.
당일 인기면에서 서태지가 안 부러웠던
한겨레신문에 [이희재의 세상수첩]을 게재하고 계시다.
독도박물관과 독도경비대에 각 1점의 작품을 기증하셨다.
독도를 찾는 대부분의 방문객들은 별도 사전 허가 없이는 정상까지의 통행이 금지되어 있다.
어쩔 수 없이 해안 접안시설 주변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귀중한 지질학적 특징을 갖춘 바위를 부여잡고 기념사진을 찍거나 날씨라도 궂으면 독도 주변을 빙둘러보고 다시 (이를 악물고 비명을 삼키면서) 울릉도로 회항해야 한다는 점에서
민족문제연구소가 10월 25일 독도의 날을 맞아 회원들과 함께 찾은 독도는 기회와 날씨가 허락한 훌륭한 추억이었다. 일본 왕실이 백제의 후손임을 생각할 때 그들은 독도 소유권이 반드시 irreversible한 상태는 아니라고 여길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쩌랴. 대한민국에는 시민이란 나라의 주인이 있는 것을.
홀로 부산에서 올라와 시청 세월호 분양소를 지키며 날밤을 세운 부산 처자에게 나의 글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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