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삶
윤태영(전 청와대 대변인)
한결같음
오랫동안 서로 만나지 않고 있어도 그가 요즘에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일을 하고 있을지 능히 짐작이 가는 친구가 있다. 그동안 지켜보아왔던 데서 체득한 느낌이 있고 살아온 이력을 알고 또 어려움에 처했을 때 어떻게 헤쳐 나왔는가를 잘 알고 있기에, 굳이 만나보지 않더라도 그 순간 그의 생각과 판단을 쉽게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그만큼 세상을 향해서 마음이 넓게 열려있고, 어떠한 신산고초(辛酸苦楚)도 일관된 마음가짐으로 이겨내 왔으며, 언제든지 사람들에게 허물없이 흉금과 속내를 터놓는, 유리알처럼 투명한 인물이다.
내가 지금 펜을 들고 인물의 됨됨이에 대해서 속속들이 쓰고자 하는 사람, 바로 안희정 최고위원이 영락없이 그런 사람이다. 그는 위에서 말한 수사에 정확히 들어맞는 인물이다. 한 치의 벗어남도 없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그는 수많은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전혀 식을 수 없었던, 청년의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게 만들었던 삶에 대한 애정과 철학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그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그의 이름을 떠올릴 때면 언제나 사람들 속에서 부대끼면서 울고 웃고 또 대화하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그런 사람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는 것도 일종의 행운이다. 나에게는 그런 행운이 있었다. 옛날 국회의원회관의 계단식 통로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다. 그는 5층이었고 나는 4층이었다. 그로부터 벌써 20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다. 야당 의원회관 사무실은 학생운동권 출신들이 또 하나의 새로운 도전을 모색하는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그를 처음 만났고, 3당합당의 부산물로 탄생한 작은 민주당의 당사에서 어깨를 부딪쳐가며 일했다. 당시 청문회 스타로 이름을 날렸던 노무현 의원은 당의 기획조정실장이었다. 그후 그는 잠시 정치권을 떠나 외도를 했다. 노무현 의원의 자서전 '여보, 나좀 도와줘'를 출간한 출판사이다. 나 역시 그와 시간을 엇갈리면서 그 출판사에서 일했었다. 90년대 중반 그는 원외가 된 노무현 최고위원의 지방자치실무연구소에서 핵심으로 일했다.
열심히 일하고 또 일을 즐겨하는 모습이었지만, 노무현 최고위원과 안희정의 정치적 진로는 쉽게 열리지 않는 듯했다. 그 시절 그와 나는 가족들과 함께 서로의 집을 오가며 삶의 기쁨과 힘겨움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언제나 꿈과 이상을 이야기했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현실의 실천방안을 고민했다. 그 고민은 마침내 2000년에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 프로젝트로 구체화되었다. 같이 일하자는 그의 제안을 나는 거절할 수 없었다. 대통령후보 경선을 준비하던 이른바 '금강캠프'! 그는 30대 후반의 나이에 이미 당의 중진 의원들 정도가 해야 할, 캠프의 살림살이를 총괄하고 있었다. 젊은 나이에 큰 짐을 맡았다고 하기 이전에 큰일을 해낼 만큼 그는 정치적으로 더욱 성장해 있었다. 그리고 대선 승리가 그에게 가져다준 고초를 묵묵히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그를 안타까움으로 지켜보았고, 다시 스스로의 힘으로 당의 최고위원으로 부활하는 모습을 보며 길게 지녀왔던 무거운 미안함을 내려놓으며 끝없는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그 시간들의 변곡점마다 그는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지방자치실무연구소에서도 그랬고 금강빌딩 캠프에서도 그랬다. 그는 조직이나 그룹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핵심이자 중추였다. 새로운 일은 안희정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오래된 일은 안희정의 손을 통해 마무리되었다. 내부적으로는 그룹의 구성원들을 관리하고 대외적으로는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해야 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그의 몫이었다. 그보다 더 잘할 수 있는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바쁜 와중에서도 그는 한국정치의 미래를 위한 창의적 모색을 하는 데 게으르지 않았다. 남보다 일이 많은 만큼 잠자는 시간을 더 쪼개어 그는 한국사회의 현실을 천착하고 새로운 문화를 습득했다.
그런 중에도 그는 사람을 대하면서 웃음과 여유를 잃은 적이 없으며, 타인과 전체를 위해 자기희생을 하는 양보의 미덕도 잃은 적이 없다. 일이 잘못되었을 경우 그 누구를 탓하는 모습도 접해보지 못했지만, '그 일은 사실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해서 그렇게 완성된 것'이라고 생색을 내는 모습도 접해본 적이 없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내가 지켜보았던 20년의 세월 동안 그에게도 달라진 것이 없지는 않다. 젊은 시절의 형형했던 눈동자는 이제 쉽게 헤아릴 수 없는 깊이로 마주앉아 있는 사람을 더욱 편안하게 해주는 그윽한 눈동자로 바뀌었다. 타고난 언변은 그동안 자신이 겪어왔던 질풍노도의 시간들과 우여곡절의 경험들이 훌륭한 비유가 되고 특별한 지혜가 되어 더욱 풍부해져 있다. 자신의 품성 때문에 겪을 수밖에 없었던 간난신고(艱難辛苦)가 스스로 표현하듯이 자신을 담금질 해온 것이다.
2009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하신 뒤의 봉하마을. 그는 대통령이 떠나고 난 큰 빈자리를 말없이 지켰다. 장례기간 중에는 수많은 일반 조문객들을 맞이하는 맏상주의 역할을 했다. 누가 시켜서, 누구의 요청 때문에 졸음을 쫓아내며 그 자리를 지킨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항상 그 모든 일을 자청해서 했다. 회의가 끝나면 빈소로 달려갔고 남들이 피하는 한밤중의 시간에도 그는 빈소를 묵묵히 지켰다. 국민장이 끝난 후 아침이면 봉화산 정토원에 올라 대통령께 인사를 올렸다. 그는 상주로서 위로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통령 주변의 사람들, 그리고 봉하마을을 찾아오는 지인들을 위로하는 데 더욱 열중했다. 어쩌면 그의 인생에서 맞이해야만 했던 시련과 아픔들 중에서 가장 처절하고 힘겨웠을 고통이었겠지만, 그는 그 순간에도 한결같은 품성과 자세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가 안희정이다.
풍운의 이면
안희정과 바둑 같은 게임을 하면 쉽게 끝이 나지 않는다. 초반부터 안희정이 연거푸 이겨 압승을 하는 경우는 예외이다. 그럴 때에는 물론 싱겁게 게임이 끝난다. 그런데 서로가 막상막하의 실력을 가지고 용호상박의 대결을 펼치게 된다면 그의 상대방은 뜻하지 않게 지구전을 각오해야 할 수도 있다. 그는 아슬아슬한 승리에 좀처럼 만족하지 않는 편이다. 아슬아슬한 패배는 말할 것도 없다. 그는 타고난 승부근성을 갖고 있다. 언제나 확실하게 승부를 가르고 싶어 한다.
승부욕이란, 실력은 물론 집념과 끈기가 담보되어야 빛이 나기 마련이다. 그에게는 확실히 그렇게 하고도 남을 만한 남다른 집념과 끈기가 있다. 그것 또한 한결같음의 또다른 모습일까? 아무튼 이 집념과 끈기가 바로 풍운아와도 같았던 그의 젊은 시절을 해석해주는 키워드이자, 오늘날의 안희정을 만들어낸 근본 동력이 아닐까 싶다.
집념과 끈기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그의 승부근성이 완전히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그를 설명하는 데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단어가 하나 있다. 바로 치열함이다. 그의 치열함은 보통 사람의 두 배 이상이다. 그는 매사에 정(精과) 성(誠)을 다한다. 바로 위에서 말했듯이 그는 남들에게는 사소한 휴식 같아 보이는 게임에도 총력을 다해 집중한다. 허투루 넘어가는 법이 없다.
원외이던 노무현 대통령과 일을 하면서 어렵게 살림을 꾸려가던 90년대 중, 후반 무렵, 아마 남다른 승부욕의 그로서도 여러 번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연구소를 꾸려나가기 위해 훗날 대선과정에서 문제로 불거졌던 장수천 생수 사업을 직접 맡아 불철주야 영업을 하고 다녔다. 사람을 만나는 자리만 있으면 생수 영업을 하는 그의 모습을 수도 없이 목격했었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는 온몸으로 그 실패를 감내했다. 그에게는 좌절이나 포기의 마음이 들어설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 시절을 거치고 나서 수년 후 그는 마침내 노무현 후보의 대선 캠프를 꾸린다. 노무현 대통령의 부산 북강서을 국회의원 선거 도전이 실패로 끝난 다음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선거에 여섯 번 도전하여 2승 4패라는 화려하지 않는 전적을 가진 노무현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들어내는 주역이 된다. 또한 그 자신, 정권이 교체된 2008년의 어려운 시기에 당 최고위원 선거에 혈혈단신으로 도전하여 당당하게 지도부에 입성하는 데 성공한다. 그는 쉽지 않은 선거마다 온몸을 던져 승리를 일구어냈다. 그 밑천은 분명 그만의 자산인 치열함이었다.
그 자신이 회고하는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은 이야기만 들어봐도 예사롭지 않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충남대학교 학생들을 만나 시국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대학생들이 읽던 책들을 섭렵하다가 직접 시위에 나섰던 모습. 그래서 결국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검정고시를 치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그야말로 그의 풍운아적 기질을 보여준다. 도대체 그는 어린 나이에 왜 그런 생각을 하고 그런 행동을 했을까?
그 해답을 역시 나는 그의 치열함에서 찾는다. 보통 사람이라면 어린 시절에 그냥 스쳐 지나쳐 버릴 수도 있었던 사회의 문제를 그는 외면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을 자신의 고민으로 내면화시켰고, 다시 행동으로 실천했던 것이다. 자신에게 다가올 불이익을 걱정하기보다는 불의를 참지 못하는 자신의 성격에 더욱 충실했던 것이다.
그와 대화를 나누다보면, 그가 사고하는 세계가 보통 사람 이상으로 무한하게 확장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사용하는 용어와 비유들을 보면, 작은 문제 하나까지도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면 떠올릴 수 없는 언어들을 구사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런데 그가 정작으로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이유는 그 치열함의 이면에서 언뜻언뜻 발견되는 한없이 여린 인간적인 모습일 것이다. 그는 그것을 일부러 숨기려 하지 않는다. 정치인이기에 항상 강해야 하고 당당한 모습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의 머리에는 없는 듯하다.
사람이 모든 일을 다 잘 할 수는 없다. 특히나 정치권에서 한 가지 목표를 향해 치달리는 사람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남들보다 더 빨리 움직이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것이 정치이다. 당연히 가족을 비롯하여 주변의 인간관계에서 소홀해지는 대목이 자연스럽게 발생하기 마련이다. 안희정의 욕심은 할 수만 있다면 그것조차도 극복하고 싶어 한다. 아내의 남편으로서 자식의 아버지로서 자신이 해야 할 도리를 다하려고 기어이 애를 쓴다. 가정뿐만이 아니다. 주변의 선배면 선배, 동료면 동료, 후배들에게까지도 자신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끝까지 노력한다. 그러한 그의 심성이 그를 매력 있는 정치인으로 만들어놓았다. 그에게는 정치인이라면 으레 들리게끔 되어있는 상투적인 비판들, 이를테면 "그 사람 달라졌어!", "무슨 자리에 올라가더니 목에 힘들어갔어!" 하는 등의 비난이나 매도가 없다. 강할 때는 한없이 강한 사람이면서도 약해야 할 때는 한없이 약한 사람, 그가 바로 안희정이다.
작은 노무현
2008년 그가 최고위원 경선에 도전했을 당시, 전당대회를 앞두고 캠프에서 회의가 열렸다. 선거 당일의 승부를 가늠할 연설을 어떤 내용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회의였다. 나에게도 회의 참석 요청이 왔다. 후보가 상당히 고집이 세니, 회의에 참석해서 후보를 설득할 수 있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달라는 것이 요청의 주된 배경이었다.
그가 아직 자리에 돌아오지 않은 시간, 회의에서는 많은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후보가 너무 자기 생각만 이야기하려고 한다는 비판들이 많았다. 대의원들의 정서를 생각해야 하는데, 자기 논리만 너무 앞세운다는 불만이었던 듯하다. 나도 거기에 한 표를 던졌다.
늦은 시각 돌아온 후보는 캠프에서 회의 끝에 준비한 연설문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많은 내용들이 채택되기도 했지만 또 많은 내용들은 후보에 의해 거부되었다. 수용한 내용들의 경우도 그는 자신의 철학과 원칙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면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소화하려고 했다. 자신의 철학과 원칙에 일맥상통하지 않는 내용은 아무리 내용이 그럴 듯하다 해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후보의 연설 자세에 대해서도 이러저러한 비판이 쏟아졌다. 그는 묵묵히 듣고 있다가, 마지막으로 결론을 정리했다. '여러분의 의견을 다 감안해서 제가 할 수 있는 방식대로 하겠습니다. 그 순간 그의 얼굴 위로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그 역시 참모들이 써주는 문장을 그대로 읽는 정치인은 아니었다. 자신의 컨텐츠가 아니면, 자신의 언어가 아니면, 설사 인정을 하더라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으려 했다. 자신의 사고 체계에서 충분히 여과되어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될 수 있을 때, 그는 자신의 언어로 변형시켜 이야기를 했다. 그것은 바로 영락없는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이었다. 다음 날 그는 전당대회장에서 좌중을 감동시키는 명연설을 했다. 그것이 최고위원에 오르는 결정적 견인차가 되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그 같은 기질은 과연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배운 것일까?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단정하고 싶지 않다. 그가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기 이전의 모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의 철학과 자신의 언어에 투철한 사람이란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많은 면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닮아있다. 비슷한 면이 많다. 오랜 세월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배운 탓일 것이다. 대표적인 한 가지를 꼽으라면 자기를 희생하는 정치가 그렇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을 만들어낸 일등공신임에도 청와대 비서진을 꾸릴 때 배제되었다. 그 상황에서 그는 자리를 고집하지 않았다. 그 후 대선자금 문제로 홀로 옥고를 치를 때에도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았다. 출옥 후에는 어떤 자리도 탐하지 않으면서 야인의 힘든 길을 걸었고 자신에 대한 사면복권조차도 강청하지 않았다. 자신의 문제가 걸림돌로 작용하는 듯이 보일 때마다 스스로 먼저 나서서 비켜서는 것이 그의 일관된 행보였다. 2008년 대통합민주당의 국회의원 공천 과정에서 공심위의 결정을 아무런 이의 없이 받아들였던 모습이 그 모든 것을 증명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자기희생의 정치를 통해 대통령이 되었기에 그 길을 따라가자는 것? 결코 그렇지 않다. 사람이 눈앞의 자기 이익을 포기하는 순간에는 그동안 지녀왔던 희망도 함께 사라지기 마련이다. 특히 정치권은 미래를 쉽게 예단하기 어려운 곳이다. 그만큼 현실의 이익이 중요한 곳이다. 그런 정치권에서 다소의 무리를 감내하더라도 자기의 이익을 끝까지 주장하지 않았던 것은 그가 명분에 충실한 정치인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매 순간마다 그는 자신이 정도라고 믿은 정치의 길을 걸어간 것이다. 나는 그 아름다운 양보와 희생에 대해 언젠가는 운명의 신이 큰 보답을 해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물론 그는 운명의 신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지금도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정치일꾼
그는 보기 드문 합리주의자이다. 사안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지도 않고 자신의 이기심으로 세상을 분석하지도 않는다. 그는 균형과 중용을 안다. 지나친 것은 부족함보다 못하다는 사실도 잘 안다. 더욱이 누구와 만나도 대화를 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의 소유자이다. 당연히 그의 주변에 사람들이 모일 수밖에 없다. 그런 그의 능력이 노무현 대통령의 대선 캠프를 꾸릴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많이 모이면 따라오는 것이 하나 있다. 일이다. 내가 그를 지켜봐온 동안 그에게 가장 많이 주어진 것은 영광이나 명예나 좋은 자리가 아니라 산더미 같은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적절한 표현인지 모르지만 그를 '정치일꾼'으로 부르는 데 주저함이 없다. 불쌍하고 가엾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 산더미 같은 일을 마다하는 것은 본 적이 없다. 지금 이 순간도 아마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는 어쩌면 일이 없으면 스스로 불행함을 느낄 체질이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세상을 올바르게 바꾸려는 열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모진 시련이 담금질하면서 만들어낸 경륜과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의 자산이 아니라 이 시대를 함께 살아온 우리 모두의 자산이다.
아주 오래 전, 그를 처음 만나던 순간이 다시금 떠오른다. 5층의 사무실을 향해 활기찬 걸음으로 계단을 걸어올라 오면서 층층마다 환한 미소로 인사하는 것을 하루도 빼놓지 않았던 젊은 청년. 그 청년은 20년이라는 세월을 투자하여 만들었던 대통령을 자신의 가슴 속에 영원히 묻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의 시대이다. 못 다 이루었던 노무현 대통령의 꿈과 이상이 그의 시대에 일보 전진될 것임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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